모임 총무가 없으면 그 모임은 1년에 0번 모인다 — 친구 관계의 보이지 않는 노동
날짜 잡고 장소 정하고 정산하는 사람은 왜 늘 같은 사람인가. 친구 사이 여덟 역할과, 각 역할이 받는 것과 못 받는 것.

오래된 모임에서 날짜를 잡는 사람은 늘 같다. 총무를 하겠다고 나선 적은 없는데, 아무도 안 하니까 계속 하고 있다. 그 사람이 한 달만 손을 놓으면 그 모임은 실제로 안 모인다.
친구 관계에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역할이 있다. 아무도 정해주지 않았는데 각자 맡고 있고, 그 역할이 관계를 굴린다.
판을 만드는 사람들
모임 총무 — 날짜, 장소, 인원, 정산. 전부 이 사람 몫이다. 받는 건 "네가 없으면 안 모여"라는 말. 못 받는 건 즐길 시간. 다들 노는 동안 혼자 정산하고 있는 날이 많다.
있으면 든든한 사람 — 이 사람이 온다고 하면 나머지도 나온다. 약속을 어긴 적이 거의 없어서 다들 기본값으로 계산에 넣는다. 못 받는 건 빠질 자유. 빠지고 싶은 날에도 못 빠진다.
분위기 메이커 — 판은 안 짜는데 판을 살린다. 어색한 침묵을 깨고 웃음 터지는 지점을 안다. 못 받는 건 조용히 있을 권리. 컨디션이 안 좋아도 올려야 할 것 같고, 그래서 집에 오면 유난히 방전돼 있다.
가만 있어도 모이는 사람 — 애써서 챙긴 적이 없는데 늘 사람이 주변에 있다. 못 받는 건 관계를 관리하는 경험. 저절로 유지되던 게 어느 순간 안 될 때 대처법을 모른다.
옆에서 받쳐주는 사람들
한 명씩 챙기는 사람 — 단톡방에서는 조용한데 개인 카톡으로 안부를 묻는다. 못 받는 건 여럿 있는 자리에서의 존재감. 1대1로는 누구보다 가까운데 모임에서는 있었는지도 모르게 지나간다.
필요할 때 나타나는 사람 — 평소 조용하다가 누가 진짜 곤란해지면 등장한다. 못 받는 건 자기가 힘들 때 부를 사람. 도움을 주는 관계만 남겨서 정작 본인 차례에는 혼자 해결한다.
조용히 안부 묻는 사람 — 잘 지내냐는 카톡이 늘 이쪽에서 먼저 간다. 못 받는 건 상대 마음을 확인할 기회. 한 번 안 보내보면 알게 되는데, 그게 무서워서 못 한다.
연락하면 늘 반가운 사람 — 3년 만에 연락해도 어제 본 것처럼 대화가 된다. 못 받는 건 관계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습관. 그 편함을 믿고 아예 연락을 안 하다가 대부분 관계를 잃는다.
역할은 바뀌지 않는데 사람은 지친다
여덟 역할 전부 주는 쪽에 있다. 총무는 시간을, 분위기 메이커는 에너지를, 안부 묻는 사람은 먼저 다가가는 용기를 준다. 그리고 관계가 오래될수록 그 역할이 당연해진다.
당연해지는 순간 고마움이 사라진다. 총무가 정산하는 게 당연하고, 분위기 메이커가 웃기는 게 당연하고, 안부가 먼저 오는 게 당연하다. 그 사람이 지쳐서 한 번 멈추면 그제야 "왜 요즘 조용해?"가 나온다.
한 번 멈춰봐야 아는 것
역할을 바꾸라는 게 아니다. 다만 한 번은 멈춰보는 것을 권한다.
총무는 이번 모임을 안 잡아본다. 분위기 메이커는 조용히 앉아 있어본다. 안부 묻는 사람은 한 달 먼저 연락을 안 해본다.
그러면 두 가지 중 하나를 알게 된다. 누군가 대신 나서서 관계가 굴러가거나, 아무도 안 나서서 멈추거나. 전자면 이제 나눠서 해도 된다는 뜻이고, 후자면 그 관계에서 나만 애쓰고 있었다는 뜻이다. 둘 다 알아야 하는 정보다.
친구들 사이에서 내 역할 테스트는 12문항으로 여덟 역할 중 어디인지 본다. 결과에 그 역할이 받는 것과 못 받는 것이 같이 나온다.